주명룡 대한은퇴자협회장

우리나라에서 시니어세대를 대변하는 단체는 많지 않습니다. 대한은퇴자협회(KARP)는 많지 않은 단체 중에 유독 돋보입니다. 소소한 단체들이 부침을 거듭하다 사라지지만 대한은퇴자협회는 2021년 1월 15일, 창립 19주년을 맞았습니다. 이 단체가 걸어온 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참으로 놀랍습니다. 연령차별금지법, 주택연금, 정년연장, 기초연금, 세대통합…. 현재 중장년 및 노년층을 위해 도입된 제도 중에서 은퇴자협회가 주창(主唱)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수혜 당사자들은 정부의 당연한 역할쯤으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대한은퇴자협회와 같은 사회단체의 땀과 눈물이 깃들어 있었던 것이지요. 대한은퇴자협회 주명룡 회장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주명룡 대한은퇴자협회(KARP) 회장

미국서 자수성가…가치있는 삶 고민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20대의 주명룡 회장은 대한항공 승무원이었다. 9년여에 걸쳐 지구를 날아다니며 드넓은 세상에서 할 일이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들은 못 들어가 안달인 회사에 돌연 사직서를 던졌다. 30대 초반에 자발적 은퇴를 선언한 셈. 그리고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 미국, 미국에서 가장 큰 도시 뉴욕 맨해튼에 정착했다. 뉴욕에서 22년 동안 거주하며 많은 일을 했다. 무엇보다 소수민족의 애환을 직접 겪었고, 목격했다. 한인들을 위한 봉사의 일환으로 뉴욕한인회장도 역임했다. 한인으로는 처음으로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건너편의 맥도널드 매장을 소유, 경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늘 허전함을 느꼈다. 어릴 때부터 타인을 존중하고 이웃과 사회에 봉사하는 삶이 몸에 배어 있는 미국인들이 자극제가 됐다. 어떻게 하면 더욱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여생을 보낼 수 있을까. 그때 그의 마음을 사로잡은 단체가 워싱턴에 자리한 미국은퇴자협회(AARP)였다.

2002년 귀국, 대한은퇴자협회 창립

뉴욕에서 자동차로 달려 4시간 걸리는 워싱턴을 오가며 미국은퇴자협회를 배웠다. 그리고 1996년 뉴욕에 대한은퇴자협회(카프·KARP, Korean Association of Retired Persons)를 설립한다. 그런데, 1997년 모국 대한민국이 파산,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는 사태가 발행한다. 뜻있는 뉴욕의 동포들은 주명룡 회장에게 한국에서 은퇴자협회를 설립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그는 경제위기와 고령화를 동시에 겪고 있는 대한민국의 퇴직 전후 세대들에게 존재의 의미와 삶의 가치를 부여하자고 결심한다. 한국행을 결정했다. 2002년 1월 15일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대한은퇴자협회를 창립했다. 당시 분위기는 대단했다. 미국은퇴자협회 테스 켄자 회장을 비롯해 김원길 보건복지부 장관, 라운트리 미국대사관 공사, 문태준 한국사회복지협의회장 등이 참석, 창립을 축하했다. 한국에 들어오기 직전인 2001년 UN NGO로 등록됐으니, 규모의 차이는 있겠으나 국제사회에서 미국은퇴자협회와 동등한 자격으로 활동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고 날개를 펼친 것이다.

미션-은퇴문화의 소개와 정착

대한은퇴자협회는 2021년 1월 15일 창립 19주년을 맞는다. 영리 목적의 기업도 존속하기 어려운 19년이란 긴 시간 동안 NGO가 살아남았으니 대단한 일이다. 대한은퇴자협회가 대한민국에 깊게 뿌리내렸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주명룡 회장은 그간의 공적으로 중장년층을 위한 다양한 제도 도입과 개선을 꼽았다. 협회가 사회적 임무로 내세우는 ‘은퇴문화의 소개와 정착’과도 부합한다. 연령차별금지법, 주택연금, 정년연장, 세대통합 등 선진제도를 한국에 들여온 장본인이다. 격세지감의 에피소드가 있다. 2002년 5월, 협회 임원들과 국가인권위원회를 방문, 연령차별금지 권고문을 요청했더니, 담당자가 “나이 차별이 왜 차별이냐?”고 반문하며 반려했다. 2009년에서야 ‘고령자고용촉진법’에 ‘연령차별금지’ 조항이 더해져 시행됐으니 7년을 싸운 셈이다. 주택연금 도입도 그랬다. 2003년, 당시 재정기획원 서기관에게 열 페이지의 제안서를 전달한 뒤 3년이 지난 2006년, 주택금융공사의 역제안으로 준비작업에 참여했고, 2007년부터 주택연금이 시행됐다. 최근 정년이 60세로 연장됐지만 은퇴자협회는 창립초기부터 줄기차게 65세를 주장하고 있다.

국내 최초 세대통합 사회운동 개척

대한은퇴자협회가 선구적으로 펼쳐온 사회운동 중 눈에 띄는 것이 ‘YOU캠페인’이다. 가부장적 장유유서(長幼有序)의 권위와 세계화로 인한 개방적 평등 기류가 격돌하던 2003년, 장·청(長·靑) 세대공감, 세대통합 운동을 시작했다. 그래서 ‘Young, Old United’다. 국내 최초, 유일의 세대통합운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주명룡 회장은 해마다 YOU캠페인을 진행하면서 중요한 사실을 알아낸다. 행사 직전 장년과 청년 절반씩 1000명 정도를 대상으로 사전조사를 벌이는데 매년 엇비슷한, 주목할 만한 결과가 나온다. 중장년층의 95~97%는 ‘내가 하는 일이 자녀세대의 일자리를 빼앗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청년층의 23~29%, 4명 중 1명 이상이 ‘아버지세대가 자녀세대의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응답한다. 청년층은 임금피크제도 탐탁지 않다. 장·청세대간 미묘한 견해차가 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자리 갈등은 아니라는 것이 그간의 경험에서 비롯된 주명룡 회장의 결론이다. 중요한 것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공감하며 소통하는 계기다. 그래서 은퇴자협회의 YOU캠페인은 한국사회에 매우 중요한 메시지를 전파하고 있다.

중장년 퇴직자 대변한 외로운 싸움

다시 중장년층의 이야기로 돌아간다. 그는, 우리나라는 퇴직 준비가 전혀 안된 상태에서 ‘명예’라는 탈을 쓴 강제퇴직이 자행되고 있다고 통렬히 규탄한다. 최악의 고용환경 속에서 50~70대는 아버지로서 자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쳐 헌신한 뒤 정작 자신은 아무런 훈련도 받지 않은 채 벼랑에서 밀려 떨어진다는 것. 가장 큰 문제는 중소기업이다. 대기업은 퇴직예정자들의 전직이나 창업을 돕기 위한 시늉이라도 내고 있다. 하지만 중소기업은 은퇴 교육이 전무하다. 그래서 은퇴자협회는 은퇴 이후의 삶을 고민하고 올바른 길을 찾자는 취지로 ‘타오름 아카데미’란 교육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무관심한 사회를 향해 목청을 높이기도 한다. 국내외 영역을 가리지 않는다. 지난 2008년 3월, 스위스로 날아간 주명룡 회장은 제네바 UN인권위원회 앞에서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벌였다. 그가 든 피켓에는 “20만원 짜리 공공근로 일자리가 무슨 일자리냐, 월 8만4000원도 연금이랄 수 있냐”고 적었다. 생색내기 노인일자리사업과 기초노령연금을 국제사회에 고발하고, 한국정부의 각성을 촉구한 것이다.

퇴직자 일자리 알선 역점사업

대한은퇴자협회가 중장년층의 재취업과 전직 지원을 위해 역점을 두고 있는 사업이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운영이다. 고용노동부 지정사업인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운영을 통해 수많은 퇴직자들에게 새로운 삶을 선사하고 있다. 간판도 ‘대한은퇴자협회’는 작게 내려달고,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를 큼직하게 올려달았다. 주명룡 회장은 기업들에 강조한다. 은퇴자는 풍부한 경력과 경험, 끈기와 지속력을 갖춘 고급인재라고, 기업은 이런 인재를 저렴하게 살 수 있다고. 퇴직자들에게는 이렇게 주문한다. 100만원의 임금을 창피하게 생각하지 말라. 너무 적다고 생각하지도 말라. 현금 5억원을 예금해야 매달 100만원의 이자를 받는다. 퇴직자에게 100만원의 월급은 현금 5억원과 같다. 당신이 머뭇거리는 순간 그 자리는 다른 사람에게 돌아간다는 것을 명심하라고. 일자리 알선은 분명 뜻 깊은 일이지만 고민도 생겼다. 협회를 방문하는 중장년층 10명 중 9명은 “회원에 가입하면 일자리를 구해 주느냐?”고 묻는다. NGO 본연의 사회운동이 아니라 정부를 대신한 일자리 알선기관으로 전락한 것 같아 내심 속상하다. 그래서 협회서 일하는 간사들을 재교육할 때마다 NGO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도록 강조한다.

역량 있는 후배들의 동참 절실

주명룡 회장이 이끈 대한은퇴자협회의 역사는 지루하고 답답한 시간과의 싸움이었고, 냉담한 사회적 무관심과의 결투였다. 정치적 탐욕에 눈먼 지도자들에 대한 분노가 누적돼 결코 포기할 수 없었다. 평탄한 삶을 마다하고 가시밭길을 걸어왔다. 그래서 가족, 특히 부인에게 가장 미안하다. 초심을 잃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회운동은 100년의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며 여전히 희망을 강조하는 저돌적인 사회운동가다. 그는 요즘 ‘은퇴문화 소개 및 정착’이란 미션을 곱씹고 있다. 베이비붐세대의 은퇴러시가 시작됐기에 더욱 고민이 많다. 이들이 안정된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정부와 기업의 역할을 끌어내는 과제를 풀고 있는 중이다. 중장년 퇴직자 또는 퇴직예정자들이 금전적 노후준비에만 몰두하지 말고, 가치 있는 일을 찾길 바란다. 은퇴자협회와 같은 NGO에 참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래서 역량 있는 후배들이 뒤를 이어 은퇴자협회를 이끌어가길 염원하고 있다. 주명룡 회장은 후배들에게 물려 줄 토대, NGO의 독립성을 담보하는 재정자립 방안 마련이 남은 역할이라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