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 역할의 경계선이 갈수록 불분명해지는 21세기를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자만이 할 수 있는 일, 여자가 나서야 하는 일이라는 고정관념이 쉬이 사라지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 상승이 무제한인 현대에서도 이럴 진데, 남녀차별이 극심하고 삼종지도를 강요하던 조선 사회에서는 여성은 숨도 제대로 편히 쉬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조선 시대는 전기와 후기 여성들의 삶이 다름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에는 고려의 풍습이 잔존했던 관계로 가정 내에서 남성들과 동등한 위치를 여성들이 차지할 수 있었으나, 후기에는 결혼 풍습과 재산 상속이 남성 중심으로 크게 바뀜에 따라 전기보다 여성들의 위치가 많이 제한받게 된다. 물론 영·정조 시대의 문화적 발전으로 인해 한글과 한문을 익힌 여인들의 학문과 문예 활동으로 ‘이빙허각’, ‘강정일당’ 등의 걸출한 인물들이 탄생하였으나, 대놓고 재능을 보일 수 없었던 양반 부녀자들과 신분적 한계에 속박된 기녀들에게 대부분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즉, 조선은 총명하고 재능 있는 여성들에게는 모질고 가혹한 사회였다.
흔히 조선 시대 여성으로서 빼어난 재능을 드러낸 인물로 ‘신사임당’과 비교하여 조선 후기의 인물로 ‘임윤지당’을 이야기한다. 임윤지당은 여성인 조선 후기 성리학자로서 시대를 통틀어 여성으로서 최초 철학자라고 할 수 있다. 임윤지당은 영 · 정조 때 강원도 원주에서 성리학자로 활동한 인물이다. 본관은 ‘풍천’으로 부친은 함흥판관을 지낸 ‘노은 임적’이고, 모친은 파평 윤씨로 호조정랑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증직된 ‘윤부’의 딸이다. 5남 2녀의 맏딸로 태어난 선생은 조선의 10대 성리학자에 드는 대성리학자 ‘녹문 임성주’의 누이이자, ‘운호 임정주’의 누님이다. 부친 임적이 양성현감일 때 태어난 임윤지당은 8세에 아버지를 전염병으로 잃는다. 결국 기울어져 가는 가세로 인해 9세에 청주 옥화 산골마을로 이사하게 되는데 이곳은 선생에게 학문적 요람이 된다. 이곳에서 총명하고 근면한 임윤지당의 모습을 눈여겨본 오빠 임성주는 과거 공부에 몰두하던 와중에 영리한 여동생에게 <효경>, <소학> 등 유교 경전과 중국 역사서를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다른 형제들에 비해 총명한 선생은 경서와 역사서에 대한 식견이 탁월했다고 한다. 선생의 당호 ‘윤지당’은 스승이자 오빠인 임성주가 지어준 것으로 신사임당의 당호 유래와 비슷하다. 윤지당의 윤(允)과 지(摯)는 주나라 문왕의 모친인 ‘태임’과 부인 ‘태사’의 친정을 뜻하는 것으로 ‘믿음이 두텁고 정성을 다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임윤지당의 집안은 대대로 올곧은 선비들을 배출한 명문가로 집안의 배경이 선생의 삶과 학문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조부는 ‘김장생’의 문인으로 ‘송시열’과 교유가 깊었던 효종 대 도승지, 형조참판, 평안감사 등을 지낸 ‘금시당 임의백’인데 왕의 신임과 맑은 성품으로 사대부들의 존경을 받았다. 선생의 부친인 노은 임적은 26세에 소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였으나 당쟁으로 인해 관직을 그만두고 은거하여 학문에 몰두한 인물이다. 가난으로 다시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실패하여 음직으로 벼슬을 하게 되었지만, 버릇 나쁜 기생을 매질한 혐의로 탄핵당하여 낙향한 인물이다. 큰 오빠인 ‘임명주’는 한성참군, 예조좌랑 등의 요직을 거친 인물이었으나 소론 중심의 탕평 정치를 비판하여 귀양을 갔으며, 선생의 스승이자 둘째 오빠인 임성주는 조선 후기 대학자로 사도세자에게 학문을 가르치기도 했던 유기설의 주창자이다. 선생의 동생인 ‘임병주’는 깨끗한 인품과 재능으로 공자 제자 ‘안회’를 닮았다는 말을 듣곤 했다고 하는데, 벼슬을 마다한 그는 학문에 몰두하다가 33세에 요절하고 만다. 선생의 막냇동생 ‘임정주’ 또한 임성주를 이어받은 대학자이다. 대대로 이어져 오는 강직하고 청렴한 성품은 임윤지당에게도 영향을 끼쳐 선생 스스로 딸, 며느리, 어머니로서 올바른 삶의 본보기가 되었고, 자신의 배움을 뽐내지 않는 겸양을 갖춘 학자로서 보수적이긴 하나 올곧은 길을 가게 한다.
윤지당은 19세에 한 살 연하인 강원도 원주의 선비 ‘신광유’에게 시집을 간다. 그러나 선생에게 여인으로서의 달콤한 행복은 허락되지 않았다. 남편과의 사이에 딸 하나를 낳았으나 일찍 죽었고, 그 뒤 자식을 보지 못했다. 27세 때에는 사랑하던 남편까지 잃어 시동생 형제들과 남편의 생모와 양모를 모시고 살게 된다. 남편이나 자식의 벼슬이 없어 외명부의 직첩도 받지 못했으나 집 안의 안주인이자 며느리로서 선생은 엄격하고도 바른 지표가 되었다고 한다. 40세가 넘어 사간원 대사간을 역임한 시동생 ‘신광우’의 맏아들인 ‘신재준’을 양자로 들여 이십 년 넘게 정성을 다해 길렀으나 선생보다 6년 앞서 1남 2녀만 남기고 28세로 요절하여 큰 슬픔을 맛보게 된다. 다음 해 스승이자 오빠인 임성주의 죽음으로 더 깊은 슬픔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선생은 5년 뒤 73세의 나이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난다.
비록 여인으로서 다복한 삶을 누리지 못했으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관계로 다른 사대부가보다 덜 엄격한 환경에서 학문을 자유로이 배울 수 있었고, 남편과 자식의 부재로 인한 말년의 기나긴 외로운 시간은 평생 배움을 탐했던 윤지당에게 학자로서의 큰 원동력을 부여하게 된다. 임윤지당 사후 3년 뒤, 선생의 높은 학문적 식견을 존경한 시동생 신광우와 남동생 임정주의 노력으로 윤지당의 사상을 집대성한 <윤지당유고>가 편찬되어 선생의 학문세계는 재평가받게 된다. 그 책에서 선생은 인간은 누구나 노력하면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열린 사고관을 지향하였는데, 본시 선하게 타고난 인간은 사욕으로 인해 타락하게 되므로 늘 최선을 다해 노력하여 바르게 살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남성과 여성을 근원적으로 평등하게 보고 그 주어진 역할만 다를 뿐이며 여성 또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평소 역사서에도 관심이 많았던 선생답게 중국 역사 인물들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을 하고 있다. 오빠인 임성주로부터 학문을 배웠고 여성에게 바깥 활동 제약이 많았던 조선 사회의 한계로 인해 학문적으로 교우할 수 있었던 인물 또한 오빠인 임성주 밖에 없었으나, 남성들만의 전유물이던 성리학에 대한 선생의 학문적 식견은 당대 남성들조차 존경할 정도였다.
여성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학문의 영역에서 당당한 패기를 보여준 여성으로서 최초 철학자 임윤지당. 가혹한 차별과 한계를 품은 조선 사회에서 여인으로서 많은 상처를 끌어안아 더욱 자신을 담금질하여 강인하고도 자랑스러운 족적을 남긴 선생의 인내와 용기에 애틋하고도 뜨거운 박수를 아끼지 않고 보내고 싶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며 아직도 잔존하는 많은 차별과 마주할 때 임윤지당의 열정적인 인고의 삶을 떠올린다면 현재의 어려움은 잊고 앞으로 나갈 동력이 절로 생겨날 것이다.
“소인은 목숨을 귀하게 여기고 군자는 정의를 귀하게 여기네. 두 가지를 겸할 수 없다면 오직 정의를 따르겠네. 이 생애는 허물이 크니 죽는 것이 도리어 즐겁겠네. 오래 살고 일찍 죽는 것이 명이 있으나 나의 처지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죽음이 마땅한 것이라면 내 집에 돌아가듯이 하겠네. 그것이 옳지 않은 것이라면 운명은 어길 수 없는 것. 오직 자신을 수양하여 자연의 순리를 따르겠네. 백 가지 근심을 생각지 말고 분수를 지키는 것이 편안하리. 어떻게 하면 편안할까? 인내가 덕이 되겠네. 인내는 어떻게 할까? 뜻을 세워 독실히 실천하리. 위대하다, 의지력이여 만사의 영수로다. 칠정이 법도를 순종하고 백체는 명령을 따르네. 능히 이 뜻을 세우면 습관이 본성대로 이루어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