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제로 뜻을 접었던 천재학자, ‘구봉 송익필’

흔히들 사람은 시대를 잘 타고 태어나야 한다고들 한다. 제아무리 뛰어나도 운이 따르지 않으면 타고난 재주를 빛낼 수 없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역사 속 인물 중에서도 시절을 잘못 만나 뛰어난 자질이 오히려 스스로 해가 되어 한평생 불운하게 살거나 오명을 지니고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 더러 있는데, ‘구봉 송익필’의 불운하고도 파란만장한 삶이 그 대표적인 한 예라 볼 수 있겠다.

구봉 송익필만큼 조선의 엄격한 신분제와 정치적 권력 다툼의 피해자도 없을 것이다. 본관이 ‘여산’, 자는 ‘운장’, 호는 ‘구봉’과 ‘현승’인 선생은 판관 ‘송사련’과 연일 정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천재라고 할 만큼 명석한 두뇌와 뛰어난 재주를 타고난 그를 시기한 운명의 장난인지 송익필은 불행하게도 집안의 얼룩진 과거 때문에 죽을 때까지 힘든 시절을 보내게 된다.

조모가 노비였기에 정승 ‘안당’ 집 안의 노비 신분이었던 부친인 송사련은 신분 상승에 대한 야욕으로 당시 천한 신분인 자신에게 관상감에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식솔들에게 은혜를 베푼 주인이자 외가인 안 씨 집안을 배신하고 역모를 고변한다. 그로 인해 송익필의 부친은 양반의 신분이 되고 관상감 판관의 자리에 오른다.

충남 당진에 있는 구봉 송익필 선생의 묘. 출처 : 한국참풍수지리학회

아버지의 배신행위로 천출에서 모두가 우러러보는 양반이 된 가문에서 송익필과 그의 형제들은 사대부 자제들과 교우하며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세상사 사필귀정이듯 부친의 악업으로 인해 송익필과 그의 형제들은 평생 아버지의 죗값을 대신 치르며 고통스러운 멍에를 짊어지게 된다.

20대에 이미 ‘이산해’, ‘최경창’, ‘백광훈’, ‘최립’, ‘이순인’, ‘윤탁연’, ‘하응림’과 함께 당대 8문장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매월당 김시습’, ‘추강 남효원’과 함께 <산림 삼걸>로 일컬어진 송익필은 학문과 시와 문장이 뛰어난 학자이다. 7세 때 <산가모옥월참차>란 시구를 쓸 정도로 명성이 자자한 그였지만, 25세에 선생처럼 학문이 뛰어났던 아우인 ‘송한필’과 함께 소과초시에 합격하여 다음 해 대과에 응시하였다가 얼손이라는 신분적인 제약이 문제가 되어 과거를 포기해야 했다.

관직에 미련을 버린 선생은 이후 온전히 학자와 교육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하는데, 그 여정의 시작에서 만난 첫 제자가 대학자 ‘송시열’의 스승이자 예학의 거성인 ‘사계 김장생’이다. 33세에 경기도 고양군 심악산 구봉 아래에서 본격적인 후진 양성에 몰두하게 되는데, 선생의 호인 ‘구봉’은 이 심악산 구봉에서 따왔다고 전한다. 김장생 외에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탄생하였는데, ‘김집’, ‘김반’ 부자와 인조반정의 공신인 ‘김유’ 등이 있고, ‘김덕령’도 한때 학문을 배웠다고 전한다.

송익필의 첫 제자이자 예학의 태두인 ‘사계 김장생’의 초상화. 사계 김장생은 훗날 대학자 송시열의 스승이 된다. 출처 : 네이버백과

2009년 4월 15일 오전 11시 논산시 부적면 신풍리 휴정서원에서 봉행된 춘향제(출처 굿모닝논산).
조모로 인한 서얼 출신이었기에 송익필은 출생과 부친의 역모 고변 행위로 인한 비난을 한평생 받아야 했고, 일찌감치 험난한 자신의 여정을 간파한 선생은 낙향하여 학문에 전념한다. 이때 ‘이이’, ‘성혼’, ‘정철’, ‘백광훈’, ‘윤탁연’ 등과 교우하였으며, 특히 율곡 이이와는 22세 때부터 친교를 맺었는데, 이이가 별시에서 장원급제 뒤 선비들과 질의 문답을 할 때 그 대답을 송익필에게 맡길 정도로 이이는 그와 동생 송한필의 높은 학식을 극찬했다. ‘토정 이지함’ 또한 “나의 벗 우계, 율곡, 구봉은 학문이 높고 밝으며 행실이 세상의 모범이 된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책 속에 파묻혀 조용히 살아가는 선생을 사화와 동서 분당으로 어지러운 세상은 가만히 두지 않았고 그는 어지러운 난세의 소용돌이에 노년을 보내게 된다. 송익필의 나이 53세에 선생의 부친인 송사련이 역모를 고변하여 풍비박산이 된 안 씨 집안에서 소송을 제기하여 안당이 무고로 판명된다. 이에 송익필과 식솔들은 안씨 가문의 노비라는 판결이 내려져 환천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가까스로 벗인 ‘이산해’와 ‘정철’의 도움으로 선생은 진안으로 도주하고 가족들은 흩어지게 되며 부친인 송사련은 부관참시를 당한다. 천만다행으로 신실한 첫 제자인 김장생의 숙부 ‘김은휘’가 송익필과 식솔들을 배려하여 십 년간 보살폈다고 한다. 그 뒤로도 동인들은 송익필이 ‘정철’과 ‘조헌’을 교사한다고 선조를 자극하여 선생과 동생 송한필은 한양으로 압송되고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석방된다.

현재까지도 송익필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것이 삼 년간 천여 명의 동인들을 처벌한 <기축옥사>를 뒤에서 조종했다는 설이다. 실제 ‘정여립’이 거사를 도모했다거나 ‘정철’이 날조했다는 이야기 등이 있다. 송익필이 이 옥사를 사주했다는 것은 당시 북인들의 주장으로 선생이 서인의 수장들과 가까웠고 억울한 노비 환천으로 인한 복수로 이 모든 것을 계획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의견을 반박하는 이들은 당시 송익필이 노비로 전락하여 쫓기는 처지로 본인의 목숨 하나도 건사하기 힘든 마당에 이런 일을 도모했을 리가 만무하다고 보고 있다. 기축옥사의 배후라는 이야기 또한 어찌 보면 시대를 잘못 선택하여 태어난 천재가 감당해야 할 누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기만 하다.

송시열이 쓴 송익필의 묘갈명(출처=네이버백과).

신분제 사회의 피해자로서 서인의 제갈공명이자 기축옥사의 조종자라는 주홍글씨를 가슴에 달고 세상을 유랑하며 한 맺힌 삶을 살던 선생은 자신에게 걸쳐진 온갖 오명을 벗겨내지 못하고 66세 때 세상을 떠난다. 송익필의 죽음을 애도하던 이들은 “북두궁의 문곡성이 빛을 잃었다”고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인조 대에 송익필의 복권이 한번 거론되지만 이루어지지 못하다가 사후 150여 년이 지난 영조 17년 ‘홍계희’의 상소로 인해 선생의 명예는 회복된다. 그러나 살아생전 반노의 자식으로 교활한 서인의 배후 조종자라는 낙인을 가슴에 묻은 채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던 그에게 흡족한 선물이었을지 의문이 남는다.

뛰어난 시인이었던 선생은 많은 시를 남겼는데 <산행>이란 시에서 극렬한 권력 다툼 속에 희생된 자신의 처지를 한숨짓고 있다.

“산길을 가며 앉아 쉬는 걸 잊고 쉬다가는 가는 일을 깜빡하면서,
소나무 그늘에서 말을 쉬게 하고 개울물 소리를 듣네.
내 뒤에 올 분이 몇이며 앞서간 사람은 또 얼마이던가,
제 각기 가거나 머물러 쉬거나 하는데 길 다투어 무엇하리.”

아버지가 물려준 악업의 굴레를 거머쥔 채 타고난 재주를 입신양명을 위해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한평생 학자와 교육자로서 최선을 다한 구봉 송익필. 선생의 개인적인 삶은 매우 한스러우나 고요하고 깊은 발자국은 결국 많은 후학을 양성하게 되고 예학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겉보기에는 안타깝기 그지없는 시절을 잘못 타고난 범인의 삶이었으나,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면 그의 학문적 맹아를 이어받은 제자들로 인해 구봉 송익필은 진정한 승리자가 아닌가 싶다.

짧고도 굵게 사는 것이 멋진 삶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송익필의 일생은 많은 부분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 누가 인정해주지 않은 사소한 한 걸음이나 오랜 시간이 흐르면 거대한 대로를 만드는 시작이 될지 모르는 평범한 오늘을 되돌아보며 보다 겸허하고도 성실하게 살아가야 하겠다는 반성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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