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호의 진정한 친구 겸 조력자, 혜강 최한기

위대한 업적은 혼자만의 힘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역사적 사례로 잘 알 수 있다. 보티첼리,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르네상스를 꽃피운 예술가 뒤에는 메디치 가문의 조력이 있었고 뉴턴이 만유인력의 발견은 17세기 영국 왕실의 과학기술에 대한 아낌없는 후원이라는 밑거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러한 사례는 우리 역사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는데 <대동여지도>라는 거목을 만들어낸 ‘김정호’ 선생과 19세기를 대표하는 실학자이자 과학사상가인 ‘최한기’ 선생의 경우가 그러하다.

최한기의 초상화. 출처 : 독서신문

두 분 다 우리 역사에 크나큰 족적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역사적인 인물들에 비교해 어떤 인물이었는지 자세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 ‘김정호’ 및 ‘최한기’와 가까이 교우했던 조선의 대표적인 실학자 ‘이규경’ 선생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간단히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양반 출신이 아닌 고산자 선생의 <대동여지도>라는 역사적 위업은 ‘최한기’ 선생의 끊임없는 조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김정호 선생과 최한기 선생의 각별한 우정은 아래에 소개한 <대동여지도>에 앞서 편찬했던 <청구도>라는 지도책의 제에 잘 나와 있는데, 평생지기로서 깊은 우정과 진정한 조력자로서의 강한 신뢰가 잘 묻어나 있다.

“(나의) 벗 김정호는 어릴 때부터 지도와 지리서에 깊이 뜻을 두고 오랫동안 찾아 열람하여, 여러 방법의 장단점을 자세히 살폈다. 매번 한가한 때를 만나 수집한 것을 세세하게 살펴 제작 방식을 견주어 보니…(중략)… 그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전도를 구역에 따라 나누었는데 이것은 우왕이 (중국) 우왕이 정전을 구호기한 것을 본받은 것이고, 가장자리의 선에 글자를 쓴 것은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게 하는) 달력의 표시 방법을 모방한 것이다.”

한눈에 보아도 벗을 위해 애틋한 마음을 담아 살뜰히 그를 대변해주고 격려해주는 선생의 마음이 느껴지는 글이다. 이 각별한 우정을 평생 주고받은 두 사람은 후일 같이 지도 제작에 나서기도 한다.

최한기가 제작한 놋쇠 지구의. 출처 : 독서신문

혜강 최한기 선생은 ‘정약용’, ‘김정희’, ‘박규수’와 함께 19세기 혼란한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조선이 나아가야 할 길을 모색한 대표적인 실학자, 과학사상가로서 알려져 있다. 본관은 삭녕, 자는 ‘운로’또는 ‘지로’이며, 호는 ‘혜강’, ‘패동’, ‘명남루’이다. 개성 양반 출신인 선생은 ‘최항’의 후손으로서‘최치현’의 아들로 출생하여 아들이 없던 당숙 ‘최광현’의 양자로 들어가 지금의 서울인 한성부 남대문 근처 창동에서 성장하였다. 가난했던 본가와 달리 부유한 당숙은 내금위장과 곤양 군수를 역임한 무관이었으나 서책과 서첩을 수집하는 취미와 거문고를 연주하는 멋을 지닌 인물이었다. 당숙과 이런 인연 때문인지 최한기 선생의 태몽은 참 특이하다. 그의 태몽은 친모가 아닌 당숙의 부인인 김씨가 꾸었다고 하는데, 꿈에서 남편이 사촌동생인 최치현의 집 담장 밑에 소나무를 심고 있었다고 한다. 꿈에서 깨어난 그녀가 남편에게 본 것을 이야기하자 그 시간에 최한기 선생이 태어났다고 전한다.

유년기 때부터 선생은 책벌레였다. 양자로 들어간 당숙의 집에서 수많은 서책을 보며 친부와 외조부 ‘한경리’로부터 글과 성리학을 배웠다. ‘추사 김정희’, ‘김헌기’, ‘연암 박지원’의 문하에서 성리학과 서학을 수학하였고, 특히 ‘김정희’와 ‘박지원’의 영향으로 직접적인 경험을 중시하는 경험주의적 인식론을 확립하게 되어 뒷날 선생의 <기학>의 체계 정립에 기여하게 된다.

학문에 열의를 가진 선생은 입신양명에는 뜻이 없었다고 한다. 이십 대 초반 생원과 진사 시험에 연이어 합격하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관직을 단념한 그는 부유한 양부 덕분에 중국에서 수입된 서책들을 연구하며 저술 활동에만 집중하였다. 물론 해박한 선생의 명성을 듣고 헌종의 외종조부인 ‘조인영’이 여러 번 영입을 제의했지만 계속해서 거절했다고 한다. 선생은 인맥으로 인재를 채용하는 당시 사회의 병폐를 싫어했고, 북학파 비주류의 학통을 이어받은 이유로 관직에 나가더라도 뜻을 펴지 못할 것을 잘 알기에 거절한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어릴 적 공부한 서학의 영향으로 그는 양반보다는 신분 고하에 상관없이 자신의 철학관과 비슷한 인물들과 교우하였다. <대동여지도>를 남긴 김정호 선생, 실학자 이규경 선생 등과 학문 토론을 하며 나라의 미래를 위해 당대 지식인으로서 많은 고민을 하였다. 특히 ‘김정호’는 선생이 벗이라고 부를 정도로 돈독한 관계였다. ‘신헌’과 더불어 고산자 선생이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도록 끊임없이 후원하였고, 첫 지도책인 <청구도>에 제를 직접 써 축하했으며, 함께 세계지도인 <지구전후도>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지독한 책벌레인 선생은 책쾌들에게 중요한 고객이었다. 책을 살 때 아무리 고가라도 반드시 사고, 싸게 팔아버려 많은 책쾌들이 몰려들었다고 한다. 해서 중국의 서책이 들어오면 선생이 가장 먼저 구하였고, 고가로 서책을 계속 사다 보니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고 한다. 형편이 어려워져 귀향하기를 권하는 이들에게 서책이 가장 먼저 들어오는 한성에서 책을 입수하는 것이 더 중요하니 힘들더라도 이사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고 전한다.

최한기와 김정호에 의해 제작된 ‘지구전도’. 출처 : 다음백과

선생은 인문, 지리, 천문, 의학 등 다양한 학문에 관심을 가졌다. 많은 서책을 연구하여 펴낸 저서로 <농정회요>, <추측록> 등 20여 종에 달한다. 유년기 시절부터 정립된 경험론적 인식론을 통해 ‘기학’이라는 학문 체계로 밀려오는 서구의 영향에 대응할 방법을 모색하였고, 당시 앞선 서구의 과학기술로 혼란한 시기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또한, 선생은 매우 앞선 교육관의 소유자였다. 과거제의 폐단을 지적하며 서민과 여성에게도 교육의 혜택을 주장하였고, 과학기술과 같은 실용적인 학문 교육을 강조하였다. 19세기 서구 열강의 바람 앞에 살아남을 방법은 과학기술의 발전임을 자각하고 멀리 내다본 선생의 혜안이다.

시대의 흐름을 감지한 선생은 통상개방을 주장하였지만 양이론을 주장하는 주류 학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뿐이었다. 조선의 처한 당시 폐단을 제대로 지적하며 개혁을 주장하였지만 체제의 안위에만 위정자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살아생전 비난받고 외면받던 선생의 사상과 저서들은 사후 중국에서 제대로 평가되어 타지에서 간행되고 소개되기 시작하여, 20세기에서야 국내에서 연구가 발표되기 시작하게 되었다고 한다.

최한기가 발제를 쓴김정호의 ‘청구도’ 지도책.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탈

평생 책을 저당 잡히며 겨우 먹고 살던 선생은 글, 서화 판매로 번 돈을 책을 구하는 데 쓰며 가난한 생활을 면치 못한다. 선생의 아들인 ‘최병대’가 고종의 시종이 되자 시종관의 부친에 대한 특별 은전으로 통정대부 중추부첨지사란 벼슬을 얻게 되었지만, 병을 핑계로 사직 상소를 올리고 물러났다고 한다.

선생의 위대함은 19세기를 살아가는 지식인으로서 서구의 열강 앞에 풍전등화 같던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고 백성들을 위해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 고민했다는 것이다. 양반 출신이나 신분 고하를 따지지 않고 늘 가난한 백성들과 함께하였고 보다 미래지향적인 관점에서 폐단을 지적하며, 통상을 거부하는 양이론자들에 맞서 혁신적인 방법을 주장한 최한기 선생의 용기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진한 감동을 전해준다.

파도는 갑자기 생겨나지 않는다. 바람을 받은 물결이 다시 내려오고 올라감을 반복하는 수많은 움직임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살아생전 그 누구도 선생의 업적을 크게 평가하지 않았지만, 선생의 고요한 노력은 고산자 선생의 <대동여지도>란 업적을 남기게 한 중요한 거름의 하나가 되었고, 후일 개화사상을 탄생시킨 풍토 마련에 기여하였다.

요즘은 다들 무엇이든 빨리 이루고 싶어 한다. 이왕이면 조금만 노력해도 눈에 보이는 더 큰 성과를 이른 시일 내에 이루기를 바란다. 그러나 진정 오랜 갈채를 받는 견고한 결과는 수천, 수억 시간을 통한 꾸준하고도 한결같은 노력이 모여 이루어진다. 급히 가려는 강박증을 잠시 내려놓고 혜강 선생의 우보를 떠올리며 어제와 같이 오늘을, 오늘과 같이 내일을 성실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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