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구한 숨겨진 의인, ‘약포 정탁’

박정한 세상 속 그 누가 인정하지 않아도 인간에 대한 신의와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이들을 우리는 ‘숨겨진 의인, 혹은 ‘작은 영웅’이라고 칭송한다. 자신의 삶터에서 묵묵히 타인을 위해 정결한 마음으로 봉사하는 그들을 보면 절로 숙연해지고 힘든 인생살이에서 희망과 용기를 얻게 된다.

크게 이름을 떨치고 자손만대 칭송을 받는 위인들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하지만 그 위대한 그들 뒤에는 크든 작든 자신의 자리에서 국가와 백성을 위해 최선을 다한 이름 없는 의인들과 영웅들의 헌신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작고도 큰 영웅 중 진정으로 백성을 위해 목숨을 걸고 의로운 업적을 남긴 이가 있으니 바로 ‘약포 정탁’이다. 조선의 대표적인 문신이었던 그는 대학자인 퇴계 이황의 문하생으로 올곧은 성품과 함께 넓은 아량으로 동시대를 살아간 이들에게 희망을 준 공직자이자 충신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정탁의 가장 큰 업적은 정유년에 죽음을 앞둔 구국의 영웅 이순신 장군을 선조와 왕의 눈치만 보는 위정자들 앞에서 소신껏 발언하여 구해낸 것이다. 왜란에 불탄 나라와 가련한 백성들을 버리고 아들인 광해군에게 분조라는 형식으로 책임을 미룬 채 도망간 선조는 왕보다 이순신을 찬양하고 신뢰하는 백성들에게 존립의 위기를 느꼈는지 자신의 명을 어긴 이순신을 한 달 가까이 가혹하게 고문하다 못해 죽이려고 벼르고 있었다.

외로이 고전하는 영웅을 투기하는 왕의 눈치를 보며 대부분의 관리가 이순신의 사형에 동조할 때 의로운 정탁은 일흔이 넘는 나이에 아픈 몸을 이끌고 1298자의 신구차 상소문을 올려 열렬히 이순신의 결백을 주장하며 변호하였다. 그와 뜻을 함께하는 류성룡과 이덕일도 강력히 이순신의 사형을 반대하여 결국 선조는 그를 죽이려는 뜻을 접고 백의종군할 것을 명하게 되고, 뒤이어 이순신은 기적과도 같은 크나큰 승리를 거둔다. 이런 인연으로 충무공 이순신의 후손들은 오랜 세월 동안 정탁의 제사에 참여하고 그에게 감사를 올렸다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정탁은 광해군의 분조를 보좌하며 김덕령과 곽재우와 같은 명장들을 발탁하여 적극적으로 추천하였다. 또한, 김덕령이 이몽학 역모 사건에 휘말려 억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 때도 이순신을 구명했을 때처럼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싸운 장수를 위해 무고함을 주장하였으나 안타깝게도 그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못해 김덕령은 참담한 죽음을 맞이한다.

정탁이 광해군을 보좌하며 쓴 난중일기인 ‘용사일기’ (사진=박약회 대구광역지회)

역사적인 영웅들을 구해낸 그의 활약과 더불어 높이 평가해야 할 것은 청렴한 공직자로서의 태도이다. 조실부모하고 서른이 넘는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 그는 조정에 믿을만한 연줄이 없어 춘추관 교리로 공직 생활을 시작하게 되는데 이를 두고 정탁의 높은 학식을 아는 이들은 안타까워했다. 그러나 그는 헛된 탐욕을 품지 않고 묵묵히 최선을 다해 공직자로서 한결같이 일했다고 한다.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이 이왕이면 좋은 자리에서 일하기를 원하며 일신의 안위를 위해 자리보전에만 급급한 경우가 많다. 하지만 정탁은 녹봉을 받는 공직자의 책임과 의무를 잘 알고 있었고 그 어떤 위치에서든 백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기에 청렴결백한 공직자의 귀감이라고 하겠다.

당시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져 정치적 대립이 극도로 치달은 상황에서 그는 뜻을 달리하는 이들이라도 적의를 품지 않고 존중하고 배려할 정도로 자비롭고 넓은 마음을 지닌 큰 인물이었다. 동인이었던 정탁은 서인의 영수인 윤두수와도 우애가 깊었고 그가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갈 때 윤두수는 아쉬운 마음을 시로 전했다고 한다.

선비정신이란 냄새 나는 방구석에서 책 속에 파묻혀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혀 학식을 자랑하며 교만을 떠는 것이 아니다. 나라와 백성을 위해 옮은 일에는 모두가 반대하더라도 목숨을 걸 만큼 자기 뜻을 공고히 하고, 생각이 다른 이들이라도 넓은 포용력과 이해심으로 그들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려 깊은 태도가 바로 선비정신의 진수라고 할 수 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무구한 역사를 거치며 많은 기적과 사랑을 베푸는 작은 영웅들과 의인들로 인해 우리는 살맛 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화려한 꽃보다 이름 모를 작고도 많은 들꽃의 암향으로 더 큰 감동과 기쁨을 얻는다. 그들의 숨겨진 노고와 땀방울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감사와 존경을 모아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낼 때, 좀 더 행복하고 밝은 미래를 꿈꿀 수 있을 것이다.

임나경
임나경
소설가이자 각본가입니다. 2017년 내놓은 ‘댐 : 숨겨진 진실’(황금소나무)은 '예스24 국내 젊은 작가들의 주목할 만한 소설'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진령군 : 망국의 요화’(밥북, 2017)은 제24회부산국제영화제와 2019아시아필름마켓북투필름에 선정됐습니다. 2017년 쓴 시나리오 '방문객(The Visitor)'은 제8회 북한인권국제영화제 초청작으로 선정됐습니다.

새글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