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흥왕 만든 신라 최초 여성섭정자 ‘지소태후’

어느 나라든 새로운 지도자가 탄생하면 반드시 같이 회자되는 이들이 있는데 바로 지도자 선출에 막대한 영향과 도움을 준 그들의 숨겨진 책사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가까이는 아내, 딸과 같은 가족부터 오랫동안 뜻을 같이한 동지들까지 그 유형은 다양하다.

진흥왕은 우리 역사에서 두각을 드러낸 신라 최초 정복 군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한강 유역과 대가야를 정벌하는 등 영토 확장으로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고 불교 중흥, 화랑제도 도입 등으로 문화와 사상적 기반 정비와 함께 막강한 군사력을 확립하여 왕권 강화를 이루어낸 왕이다.

재밌는 사실은 이러한 진흥왕이 즉위한 나이는 7세라는 어린 나이다. 일반적인 역사적 사실에 기인할 때 어릴 때 즉위한 왕이 왕권 강화와 정치 안정을 이루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 대표적인 예로 신라 혜공왕과 애장왕, 조선 단종과 명종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진흥왕은 이러한 역사적 진행 행태와 달리 온전하게 정권을 위임받고 신라에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그의 생모 ‘지소태후’의 섭정이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진흥왕의 생모로 기술된 지소태후 전신상. 출처:문화콘텐츠닷컴

지소태후는 진흥왕의 모후이자 법흥왕의 친딸이다. 진위에 논란이 많은 필사본‘화랑세기’에 지소태후는 미실 이전에 활약한 여성 정치가이자 법흥왕 후기부터 진흥왕 중기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친 신라 최초 섭정자로 소개되어 있다. 그녀는 어린 왕을 대신한 섭정자였으나 매우 안정적으로 정권을 넘겨준 인물로 평가되고 있는데, 다수의 학자는 진흥왕 즉위 후 11년간 섭정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진흥왕 초상화. 출처 : 다음백과

필사본‘화랑세기’에 따르면 진흥왕의 외조부인 법흥왕이 후계자로 생각한 이들은 그의 애첩이자 미실의 외조모인 옥진궁주 사이에 태어난 비대전군과 지소태후의 두 번째 남편인 박영실이란 인물이었다고 전한다. 정치적 감각이 탁월했던 지소태후는 아들을 군주로 만들기 위해 옥진궁주의 아버지인 위화랑과 다른 공주들과 설득시켜 그들의 도움으로 비대전군과 박영실 대신 친아들을 왕위에 옹립시킨다.

진흥왕은 사실 선대왕의 친아들이 아니었던 관계로 왕위 계승과 멀었던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어린 아들의 정치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지소태후는 최선을 다하기 시작한다. 법흥왕이 공인한 불교를 신앙적 기반으로 다지기 위해 불교 진흥을 위한 많은 일을 하였는데 진흥왕 10년에 양무제가 보낸 진신사리를 처음 신라에 들여오도록 하였고 선대왕 때 시작한 흥륜사를 화려하고도 웅장하게 완공시킨다. 이와 같은 일들은 아들의 왕위 계승의 당위성을 부여하여 그의 정치적 위상도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증왕 때부터 활약한 당시 최고 전략가인 이사부(근래 불교 공인을 위해 희생한 이차돈의 삼촌이라는 해석도 있다)는 그녀의 정치적 동지로(‘화랑세기’에는 그녀의 애인으로서 미실의 남편 세종전군의 친부로 소개되어 있다) 군사적 기반을 다지는데 크나큰 후원자로서 역할을 다한다. 진흥왕 2년에 이사부를 병부령에 봉해 왕위 위협 세력에서 어린 왕을 지켜내도록 유도하였고 군사력 정비로 진흥왕이 후에 영토 확장을 할 수 있는 근간을 마련하도록 한다. 또한, 이사부의 건의로 진흥왕 6년 국사를 편찬하게 되는데 이것은 진흥왕이 군주로서 위상 정립을 확실히 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이사부와 지소태후의 협력 관계는 선대왕에서부터 이어진 반대 세력을 소멸시켜 신라를 정치적 분열에서 내부적 통합을 가기 위한 기초를 마련한다.

삼국통일의 원동력이자 왕실을 보위한 화랑제도 역시 지소태후 섭정 기간에 성립되었다고 보는 의견이 많다.‘삼국사기’에는 진흥왕 37년에 도입되었다고 하나, 진흥왕 23년에 화랑이 사다함 무리와 함께 대가야 정벌에 나섰다는 사실이 있어 지소태후 섭정 시에 화랑제도가 성립되었다고 보는 견해가 다수다.

어머니의 뛰어난 정치력으로 진흥왕은 후일 마음껏 자기 뜻을 펼쳐나간다. 어린 나이에 즉위하고도 군주로서 많은 업적을 이루어낸 가장 큰 힘은 어머니 지소태후가 확실히 조성한 정치적 기반에서 나온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또한, 그녀에 대해 높이 평가할 것은 순수한 모성으로서 아들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다. 많은 역사적 기록에서 어린 왕을 내세운 모후의 섭정은 도를 넘어 탐욕스런 일면을 보여주고 심지어 그 마지막 모습이 매우 초라한 경우가 대다수다. 그러나 지소태후는 정치가로서의 야심을 내려놓고 아들에게 모든 것을 물려주고 비구니로서 출가하여 생을 마감했다고 전한다.

현재까지도 우리는 그 어떤 분야든 숨겨진 조력자로서 만족하지 않고 더 큰 욕심 때문에 추악한 일면을 보이는 이들을 보고 있다. 조력자는 조력자로서 역할을 다하고 물러날 때 가장 아름다운 법이다. 도를 넘은 과욕과 온당치 못한 도움은 항상 더 큰 실망과 좌절을 가져온다는 것을 역사는 묵묵히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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