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나만의 추억

농기계가 없던 시절, 사람 대여섯 몫 일을 하던 소가 농사를 지었다. 농사뿐 아니라 경제적 측면에서도 재산목록 1호였다. 축산조합에서는 농가에 준 배내기 암소, 바꿔치기를 막기 위해서 소 비문(鼻紋)을 찍었다. 소 비문 역사는 1962년에 탄생한 주민등록할 때 찍는 사람 지문보다 더 오랜 역사다. 덕자 아부지는 소를 앞세워 들로 갔다가 어둠이 내리면 소를 앞세워 집으로 온다. 덕자네 뿐 아니라 소 사육하는 농부는 마캉(전부) 소와 함께하는 하루였다.

어느 집이든 자식 못지않게 소를 사랑했다. 부잣집은 소 관리만 전담으로 하는 꼴머슴을 따로 두기도 했다. 여름방학이면 나는 하루 소꼴 3멍을 베어 덕자네 집 갖다 주면 소는 하루에 다 먹어 치우는 소배다. 마을 사람들은 우리 식구가 없을 때 나를 덕자네 꼴머슴이라 했다. 꼴머슴이 된 사연은 점순이와 뜯은 쑥을 덕자네 뿍지(여물) 칸에 갖다 준 것이 인연이다. 점순이는 겨울방학 때 안동읍내에서 갈라산막장마을로 이사왔다.

이사 온 이틀 날, 삼총사(순돌이, 덕수, 철수)와 점순이가 딱지치기를 했다. 삼총사 중 힘이 제일 쎈 덕수가 점순이를 얕잡아보고 억지를 써서 딱지를 빼앗았다. 이에 격분한 점순이와 덕수 싸움에서는 코피를 먼저 흘린 덕수가 졌다. 재미삼아 아이들 싸움을 구경하던 동네 어른들은 덕수를 이긴 점순이에게 ‘섬 머스마’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 후부터 뽀얀 얼굴에 예쁜 점순이한테 예쁨 받고자 삼총사는 앞 다툼이었다. 목소리만 들어도 보고픈 점순이가 “나에게 쑥 뜯으러 가자” 찾아 왔다.

“덕수, 철수도 불러서 같이 가자”는 점순이의 명령에 따라 같은 반 친구 4명이 쑥 뜯으러 나섰다. 나는 “어매 점순이하고 쑥 뜯으러 갈란다.” “솬지(송아지)도 없는데 쑥을 캐서 뭐할라 꼬,” “어매 우리도 다음 장에 솬지사자” “알았다. 우리도 다음 장에 솬지사자.” 이 말은 우리 식구가 뼈 빠진 한해 농사를 겨울노름판에 다 날리는 아부지 때문에, 까맣게 탄 어매가슴에 숯 부셔지는 소리란 것을 나는 안다.

몇 해 전만해도 마을에는 덕자네 작은 집, 큰 집만 소가 있었다. 덕수네는 작년 가을에 사온 솬지가 중솬지 되었고, 철수와 점순이네도 두 장전에 솬지를 샀다. 마을 40여 가구 중 우리를 비롯해 대여섯 집만 소가 없다. 개구리가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이 지났지만, 여기저기 둔벙지에는 얼음이 그대로였다. 겨울 아침 해는 10시경에 떠서 오후 3시경에 지는 우리 마을에 얼어붙은 겨울을 녹이기까지는 더 기다려야 봄이 온다. 점순이와 삼총사는 마을에서 봄이 제일 먼저 온다는 양지골로 갔다.

아무리 양지 골이라지만, 아직은 뼛속까지 시린 겨울 찬바람이었다. 세계 제2차 대전 중인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이어 8월 9일 나가사키에 미군이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21만 여명이 목숨을 잃고 한포기 풀까지 다 말라 죽은 폐허가 되었다. 거기서 제일 먼저 살아났다는 쑥, 강한 추위도 두려워하지 않고 어떤 식물보다 먼저 봄나들이를 나온다. 앞서 걷던, 덕수가 “야! 여- 쑥이 천지삐까리다(매우 많다).”라는 가물(고함)을 따라 갔다.

한 해 살이 풀이 겨울 추위를 견디지 못해 선채로 죽어있는 포기 사이에 쑥이 여기저기 다투어 고개를 내밀었다. 어떤 것은 금지손가락 만큼 자랐다. 나는 “아구야 쑥이 하마 이캐 많이 컸나?” 하는 감탄사에, 철수가 “우리가 쑥 캐 가지고 넷이 똑 같이 농기자(나누자).”는 말에, 덕수가 “아니다 철수야 니캉 내캉 점순이하고 셋이 농기면 된다. 순돌이네는 솬지가 없다.” 덕수가 한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어매가 다음 장날 솬지 사온다 캤다.” 섬 머스마 점순이가 ‘맞다’며 내 편을 들어 주었다.

그래도 덕수는 돈 없는 노름꾼 집에서 무슨 돈으로? 하는 의심은 풀지 않은 눈치였다. 나는 쑥을 캐서 그냥 주기가 아까워서 불쑥 나온 말이었다. 점순이가 달라면 몰라도… 점순이와 삼총사는 쉬지 않고 쑥을 캤다. 점순이가 “우리 인제 고만 캐고 집에 가자.” 나는 점순이 말에 누구보다 먼저 동의 추임새를 넣었다. 욕심이 많은 덕수도 “그래 고만 캐고 똑 같이 농기자.”

각자 대래끼(삼태기)에 담긴 쑥을 한곳에 모았다. 철수가 네 몫으로 공평지게 나눈다고 나누었다. 지켜보고 있던 점순이가 “야 저쪽이 더 만타.” 덕수가 “아이다. 이쪽이 더 만타.” 다툼이었다. 나는 “장깨이 숫(가위바위보)해서 이긴 사람이 맘대로 골리자.” 덕수가 1등 많게, 그 다음 2등, 3등, 4등 순으로 다시 나누었다. 넷은 손을 머리뒷꼭지에 숨기고 “장깨이 숫”에서 점순이, 철수, 나 순으로 덕수가 꼴찌했다.

풀이 죽은 덕수는 “너 먼저 가그라.” 하면서 쑥을 더 캤다. 쑥을 제일 많이 캔 덕수가 ‘장깨이 숫’에서 꼴찌로 제일 적게 가졌으니, 화가 났을 뻔도 했다. 그저래 흐른 세월에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덕수와 철수는 서울 공식이로 갔다. 삼총사 중 힘이 제일 약한 순돌이 아끼고 사랑해주던 섬 머스마 점순이는 가발공장 공순이로 갔다. 나는 기술 배우려면 주인집에 주어야 하는 3달 식량 값이 없어 덕자네 반머슴으로 각자 헤어졌다.

50여년이 지난 지금 내 귀를 스쳐 지나가는 이야기다. 뭐든지 열심이던 덕수는 중소기업사장님. 마음씨 좋기로 이름난 철수는 서울어딘가에서 막걸리 한잔에 개똥철학을 읊는 노숙자란다. 부산 어딘가로 시집갔다는 점순이 지지바가 오늘따라 무척이나 보고 싶다. 긴 세월에 떠밀린 투덜거리는 내 발자국소리도 희미하게 살아져 가는 넋두리다. 내 추억에 그림마저 영원한 어둠에 밤이 오면 지구상에서 흔적마저 지워지고 말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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