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도 원작자, 천재 화가 ‘김명국’

흔히들 신년을 맞이하거나 이사를 하고 나면 흉한 액을 막고 수액을 차단한다는 목적으로 ‘달마도’를 구하여 걸어둔다. 여러 화가의 달마도가 있지만 우리가 자주 접하는 달마도는 조선 시대 ‘취옹화사’로 유명했던 연담 ‘김명국’의 ‘달마도’ 복사품이 대다수다.

김명국은 조선 중기 화단을 대표하는 천재 화가이다. 왜란과 호란을 경험한 침체된 조선 화단을 재건하는 데 크게 이바지한 그는 생몰년 미상일 정도로 미천한 신분 출신인데 이것은 각종 의궤에 그의 이름 명국이 ‘明國, 鳴國, 命國’으로 각기 다르게 적힌 것만 보아도 추측할 수가 있다. 도화서 소속이었다고 하나 신분이 낮은 화원의 이름을 중히 여기지 않은 유교 중심 계급 사회의 실상을 여실히 보여주는 한 예라 하겠다. 자는 ‘천여’, 호는 ‘연담’ 혹은 ‘취옹’으로 알려진 김명국은 도화서 화원과 교수로 재직하며 의궤 기록에 의하면 35년 동안 16번이나 국가 행사에 차출되어 일하였다고 전해지는데 62세라는 고령에도 불릴 정도로 화원으로서 착실하게 활동하였다.

김명국의 ‘달마도’. 통신사 수행 화원으로 갔을 때 그린 것으로 추측. 출처 : towooart

조선 후기 미술평론가인 남태응의 <청죽화사>에서는 ‘김명국 앞에도 없고 김명국 뒤에도 없는 오직 김명국 한 사람이 있을 따름이다’라고 적혀 있을 정도로 그의 화풍은 비범하고도 놀랍다. 남태응의 <청죽화사>에서 ‘김명국은 그림의 귀신이다. 그 화법은 앞 시대 사람의 자취를 밟으며 따른 것이 아니라 미친 듯이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 주어진 법도 밖으로 뛰쳐나갔으니 포치와 화법 어느 것 하나 천기가 아닌 것이 없었다’라고 말한 극찬과 신위의 ‘인물이 생동하고 필묵이 혼융하여 백 년 이내에는 필적할 이가 없을 것 같다’는 감탄처럼 그 명성에 비해 남겨진 작품은 채 30점도 되지 않지만 현존하는 작품들로부터 거칠지만 자유롭고 신비로운 매력이 흘러넘침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일본에서 선종화로 그려진 두 점의‘달마도’는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필법이나 고도의 집중력을 가지고 그린 수작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바다.

작품에서도 알 수 있지만 그는 얽매이기 싫어하는 거칠고 자유분방한 예술 세계를 지니고 있었고 그로 인해 많은 기이한 행동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장난꾸러기였다. 그중 인조와 관련된 것이 유명한데, 인조는 공주의 머리빗에 그림을 그리라고 김명국에게 명을 내렸다. 그러나 돌아온 공주의 빗에는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공주가 머리를 빗다가 빗에 이 두 마리가 발견하고 놀라 죽이려고 했는데 다시 보니 그것이 김명국이 그린 이 두 마리라 인조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김명국의 ‘달마절로도강’. 출처 : 위키미디어

‘최북’, ‘장승업’과 함께 조선시대 3대 기인 화가로 손꼽히는 김명국은 술이 없으면 붓을 들지 않을 정도로 애주가이자 대주가라고 전한다. ‘취옹화사’라는 별명처럼 술은 그에게 창작을 위한 필수적인 영감이자 예술적 동료였다. 적은 녹봉을 늘 술로 탕진한 김명국은 그림을 그리기 전에 한 번에 두어 말 정도의 술을 마셨고 그림을 그릴 때 취해야 필치가 자유분방해져 더욱 신운이 넘쳐흘렀다고 한다. 또한 대취한 상태에서 그린 작품 중 걸작들이 많은데, 재미난 것은 그의 작품 중에는 걸작과 태작들이 섞여 있는데 술에 취하고 싶으나 아직 덜 취한 상태에서는 걸작이 나오고 대취하면 태작이 나왔다는 것이다. 거기다 천한 출신인지라 사회 지배계층인 양반들의 명에 의해 많은 작품을 그려야 했기 때문에 태작이 나오기도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남유용의 <뇌연집>에 따르면 ‘그에게 그림을 받으려면 반드시 큰 술독을 지고 가야 했고 사대부가 그를 초대하려면 술을 많이 준비해야 했다. 그는 주량에 흡족하도록 마신 후에야 비로소 붓을 잡았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그를 주광이라 불렀다’고 적혀 있다.

김명국의 ‘사시팔경도’. 출처 : towooart

술과 관련한 유명한 일화로 영남의 한 사찰의 명부전에 그려진 ‘명사도(지옥도)’ 이야기가 있다. 주지승의 부탁을 계속 미룬 그는 어느 날 술에 취해 비단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는데 지옥에서 고통받는 이들이 모두 승려로 그려져 있었다. 화가 난 주지승이 따지자 술을 주면 고쳐주겠다고 했고, 어쩔 수 없이 주지승은 그에게 술을 갖다 주었는데 다시 취한 김명국은 승려들의 모습을 금세 다르게 수정하여 모두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승려가 사례로 준 삼베 수십 필을 아내에게 오랫동안 마실 술로 다시 바꾸어 오라고 했다고 하니 술은 김명국에게 예술을 위한 뮤즈이자 생명수나 마찬가지였다.

김명국의 진가는 사실 일본인들이 먼저 알아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통신사로 파견된 화원들은 일본의 지형과 생활 모습들을 그리는 기록화와 조선의 우수한 문화 전파를 위해 현지인들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주는 두 가지 임무를 갖고 있었다. 조선통신사 수행원으로서 민간 외교를 위해 1636년 4차와 1643년 5차 조선통신사행에 따라간 그는 열도를 한순간에 미혹시켰다고 한다. 특히 5차 통신사행은 일본의 공식적인 요청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니 일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의 신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통신사 부사 김세렴의 <동명해사록>에는 그림과 글씨를 청하는 왜인들로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김명국이 울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을 정도로 일본인들의 지극한 사랑을 받았다.

조선과 마찬가지로 열도에서도 김명국의 술과 그의 자유분방한 기질과 관련된 일화가 전해진다. 한 일본 유지가 그로부터 벽화를 얻기 위해 비단으로 장식된 세 칸 건물을 짓고 맞이했는데, 조선의 자유분방한 화원은 늘 그렇듯 술에 취해 그림 재료인 귀한 금물을 입에 머금고 벽에 뿌려버렸다. 화가 난 일본 유지는 따지려고 했으나 김명국은 웃으며 뿌려진 금가루로 걸작을 만들어내 그를 감탄시켰고 많은 일본인이 그 벽화를 보기 위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또한 훗날 일본인들이 조선으로 직접 찾아와 그의 작품을 사갈 정도로 김명국에 대한 열도의 사랑은 매우 뜨거웠다. 일본의 수묵화는 ‘선종화’로 대표되는데 김명국의 선화의 흐름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는 관점이 많다. ‘마상재’에 이어 또 다른 역사가 증명하는 자랑스러운 한류 열풍이라고 할 수 있겠다. 현재 국립 중앙 박물관에 소장된 두 점의 달마도는 일본에 있던 그의 작품들을 국립 중앙 박물관 측에서 사온 것이라고 한다. 오랜 세월 동안 가보처럼 여기던 작품들을 눈물을 머금으며 돌려줘야 했던 일본인들의 마음을 감히 짐작해보고 남음이 있다.

90년대 시작된 한류 열풍이 대한민국의 국위선양을 확실히 하고 있다고는 하나, 역사 속에서 눈부시게 활약한 문화예술인들의 발굴은 미흡하다고 볼 수 있다. 훌륭한 문화유산의 탄생은 새로 만들어내는 일만 아니라 옛것을 이어받고 현대에 맞게 그 가치를 재평가하는 작업에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지난봄에 소개한 ‘마상재’와 더불어 자신만의 자유롭고도 독특한 화풍으로 일본인들의 마음을 오래도록 흔들어놓은 ‘취옹거사 김명국’에 대한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액운을 방지하는 부적처럼 치부했던 그의 작품을 이제는 설레는 마음으로 긍지를 가지고 대하길 바라본다.

새글모음

댓글을 남겨주세요

댓글을 입력해 주세요!
여기에 이름을 입력하세요.
Captcha verification failed!
CAPTCHA user score failed. Please contact 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