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꽃, 충혜왕의 순애보 ‘은천 옹주’

흔히 야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는 왕이 총애한 경국지색들에 관한 것이다. 시대를 불문하고 현재까지 사랑 이야기는 질리지 않는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순수하고 애틋한 연정은 영원한 찬사를 받으며 길이 빛나건만 백성과 나라를 도탄에 빠지게 한 이기적인 사랑은 그들의 씻길 수 없는 치부가 되어 회자하고 있다.

조선 ‘연산군’의 천생연분으로 ‘장녹수’를 떠올리듯, 고려 ‘충혜왕’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이가 있으니 바로 ‘은천 옹주’ 혹은 ‘오지 옹주’로 알려진 ‘궁인 임씨’이다. 고려의 대표적인 폭군으로 알려진 충혜왕은 공민왕의 친형으로 두 번이나 왕위에서 쫓겨난 인물이다.

충혜왕 초상화. 출처 : 다음백과

얼마 전 방영된 역사 관련 프로그램에서도 보여주었듯, 충혜왕은 여성 편력과 물욕이 대단한 인물이었다. 한번 왕위에서 쫓겨나고도 정신을 못 차린 그는 복위 후에도 아버지의 후궁뿐만 아니라, 외숙과 장인의 처까지 눈에 드는 여인들은 거침없이 범하였는데 나중에는 후궁이 백여 명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과히 근친, 혼인 여부, 신분 관계를 초월한 패륜아이자 지독한 성범죄자라 할 수 있다.

또한, 재리에 밝아 여러 경제정책을 시행하였는데 이는 부국강병이 아니라 자신의 사치스런 생활을 위한 편법이었다. 왕실 재정 담당기관을 확장하고 소은병 통용과 염장도감 설치로 왕실 재정 확보를 위해 노력했는데, 사무역을 이용하여 재화를 모으는 것도 모자라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까지 착취하였다고 한다.

포악무도한 패륜아이자 범죄자인 그에게도 순애보가 있었는지 수많은 후궁 중 각별히 아끼고 사랑한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오지그릇 장사꾼 ‘임신’의 딸인 ‘궁인 임 씨’였다. 원래 충혜왕의 친척인 ‘단양대군’의 여종이었던 그녀는 타고난 총기가 있었던지 탐욕스럽고 음탕한 그의 기질을 완벽하게 이해하여 그가 취한 여인들을 모두 제치고 왕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다. 애첩을 향한 충혜왕의 애틋한 마음은 사서에도 잘 나와 있는데, 그녀가 아들 ‘석기’를 낳자 시전의 베와 비단을 강탈하여 선물로 주었고, 천한 신분의 한계로 번듯한 첩지를 받지 못해 서운해하는 궁인 임 씨를 위해 ‘은천옹주’에 봉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신하들은 상식에 어긋난 왕의 진정한 사랑을 조롱하듯 궁인 임 씨를 ‘사기 옹주’, ‘오지 옹주’라고 불렀다. ‘처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 보고도 절을 한다’라는 말이 있듯, 궁인 임 씨에 대한 충혜왕의 애정은 극에 달하여 그녀의 아버지 ‘임신’을 천한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대호군’이란 종삼품의 지위에 오르게 하고, 기고만장한 임신이 당대 실세였던 ‘기황후’의 남자 형제인 ‘기륜’까지 얕보고 구타하는 사건까지 벌어지자 임신의 편을 들며 기륜의 집까지 헐어버렸다고 전한다.

충혜왕의 거침없는 애정 행각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마땅했지만, 역사 속 어리석고 덩둘한 군주들이 그러했듯 자신을 되돌아보지 않고 파국으로 치닫는 행보를 멈추지 않는다. 그는 사치가 심한 궁인 임 씨를 위한 신궁을 짓도록 명하는데, 화려한 신궁을 위해 굶주리는 백성들의 고혈을 사정없이 쥐어짜고 불교 국가인데도 불구하고 사찰의 돌계단까지도 가져와 궁을 짓는 데 썼다. 창고가 일백 칸이나 되는 이 궁은 곡식과 비단으로 가득 채워진 창고와 함께 행랑에 비단을 짜는 여공을 두어 그들을 위한 놀이터를 겸한 각종 재화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이용하였다.

역사 속 폭정을 일삼은 군주들의 말로가 비극으로 끝나듯 충혜왕과 궁인 임 씨의 마지막도 행복하지 못했다. 원의 황후이자 실세인 기황후의 오라비인 기철은 왕의 패악을 참지 못해 결국 원나라에 고해 왕을 폐위시키고 충혜왕의 아들을 왕으로 옹립시킨다. 유배된 충혜왕은 악양현에서 짧은 삶을 마감하게 되는데, 독주를 마셨다고도 하고 좋아하는 귤을 먹다 죽었다고도 전해진다. 그가 애지중지하던 애첩인 궁인 임 씨, 은천옹주는 다른 후궁들과 함께 궁에서 쫓겨났고 그가 낳은 아들 석기 또한 만덕사 승려로 있다가 숙부인 공민왕 때 모반 사건에 휘말려 죽음을 맞게 된다.

다정도 과하면 병이 된다는 말처럼 과한 사랑은 독이 되어 돌아오며, 특히 나라와 백성을 저버린 이기적인 사랑은 망국의 지름길이다. 지도자의 권위는 사적인 감정에 동요되는 순간 상실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야사 속 군주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는 우리에게 재미난 입담 거리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뼈저린 역사적 교훈 또한 가르쳐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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