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추석엔 스스로 택한 고독사만 없었으면

불교는 종교이자 철학이다. 독일 비판철학자 칸트(Kant, Immanuel 1724~1804)는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스스로 정한 3가지 질문에 답을 찾으려는 노력이 철학이다. 불교역시 물음에 답을 찾아 간다. 선방스님들은 ‘무엇이 나인가?’ 하는 끝없는 물음에 물음을 던져 ‘참나’, 답을 찾고 찾는 끝없는 수행이다.

1897년 타이티 섬에서 고갱(Gauguin, 1848.~1903.)은 가난과 질병, 몸서리처지는 고독, 딸 ‘알린느’까지 저세상으로 보낸 충격에서 죽음을 결심했다. 그는 죽기 전에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철학적 제목에 그림으로 인간 후배들에게 큰 물음을 던졌다.

질문으로 풀어도, 풀어도 풀리지 않은 우리네 인생, 많은 철학자와 종교가 무엇이 인간다운 참 삶인가? 물음에 답을 찾았고 지금도 저마다 나름대로 답을 찾고 있다. 아직은 명쾌한 답이 없는 것이 답이다. 숙명(宿命)은 어떤 노력이나 의지로도 바꿀 수 없어 정해진 대로 살 수밖에 뿐인 인생이다. 정해진 운명(運命)이라지만, 운명은 노력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한다.

독일철학자ㆍ시인인 니체(Nietzsche1844~1900)는 ‘아모르 파티[라틴어 : Amor fati 운명애(運命愛)]’에서 피할 수 없는 운명,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어라. 더 높게, 더 넓게 개척해 나아갈 디딤돌바탕으로 운명을 이용하라 했다. 운명에 고개 숙여 복종하지 말고 ‘운명아 비켜라 내가 나간다.’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라는 뜻이라 하겠다.

기독교는 유랑생활에서도 끈을 놓지 않고 이어온 종교다. 유량생활은 어디에 무엇이 있을지? 운이 좋으면 사막에서 오아시스와 풍성한 먹거리를 만나 행복할 수 있다. 반대이면 몇날 며칠 물 한 방울구경도 못해 마른 침으로 타는 목을 적시며 죽음과 싸워야 한다. 죽음 앞에서 신께 열심히 기도해 오아시스를 만났다면 누가 신을 믿지 않을까? 인간 삶과 자연환경, 모든 것은 신에 의해 결정된다는 믿음이라면 신께 구원을 청하는 기도는 당연하다.

불교창시자 싯다르타는 “너도 나보다 더 열심히 마음공부해서 나보다 더 훌륭한 부처가 되어라.”, “부처는 밖에서 찾지 말고 내 마음에서 찾아라.”, 불교는 정착민 종교다. 열심히 농사지으면 행복한 풍년을 맞을 살 수 있다. 노력 없는 개으름으로 신께 기도만으론 풍년이 없다는 것을 잘 안다. 불교는 내 마음밖에 신보다 믿을 수 있는 내 마음 다스리기를 더 중히 여긴다.

스님들이 화두로 많이 드는 방하착(放下著)은 번뇌, 갈등, 집착, 원망을 마음에서 내려놓으라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방하착하면 ‘놓아라.’ 로 통하는 설화 한 토막이다. 어느 탁발스님이 산세 험한 가파른 절벽을 오르는데 어디선가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소리가 들렸다. 소리 나는 쪽으로 다급히 올라가니 “사람 살려, 사람 살려” 애끓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다. 스님은 어딘가 두리번거리다가 찾았다. 소리는 절벽나뭇가지를 붙잡은 어떤 사람이 살려달라는 하소연에 절규였다. 스님께서 ‘이게 어떻게 된 영문이오?’ 물었다.

“나는 앞 못 보는 맹인입니다. 먹고 살길이 없어 산 너머 마을에 동냥 가던 중, 발을 헛디뎌 낭떠러지에 굴렸습니다. 굴러 떨어지다가 구사일생으로 나뭇가지를 붙잡았습니다. 뉘신지 모르오나 어서 나를 좀 살려 주셔요. 팔에 힘이 다 빠져 잡은 나뭇가지에서 손이 풀리면 황천길로 가야하니 제발 빨리 좀 살려 주세요.”

스님께서 자세히 살폈다. 나뭇가지에 매달린 장님 발바닥에서 땅까지는 1m미만이었다. 매달린 나뭇가지 밑 땅바닥은 10㎡정도 평평한 잔디밭이었다. 매달린 나뭇가지를 놓아도 어디 하나 다치거나 생명에는 지장 없어 보였다. 스님은 ‘그냥 잡고 있는 나뭇가지를 놓아라. 방하착하세요. 그러면 아무런 문제없이 평평한 잔디밭에 떨어집니다.’라고 일어주었다.

그러자, 맹인은 다시 애원했다. ‘내가 나뭇가지를 방하착하면 만길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습니다. 앞 못 보는 맹인이라고 그러지 마시옵고 제발 나를 살려 주시옵소서’ 거듭 애원했다. 스님은 ‘우리불교 제일계율은 살생하지 마랍니다. 탁발승인 내가 처사님을 죽음으로 살생하겠습니까?’ 하며 목탁염불을 했다. 맹인은 나뭇가지를 놓자 가볍게 땅에 엉덩방아를 찧었다.

살기위해 잡은 나뭇가지 ‘방하착’ 못하는 맹인처럼 작은 욕심하나 ‘방하착’ 못하는 우리가 아닌가? 국민세금 지돈인양 여야대표 앞 다투어 복지 포플리즘 빚잔치 가관이다. 우리는 기업수출로 먹고 사는 나라다. 기업 죽이는 공정경제 3법, 청(靑)과 여당보다 앞장선 사쿠라꽃 야당비대위원장님 베네수엘라를 아시나요. 부모님 빚은 많으면 상속포기하면 된다. 포기할 수 없는 국가채무, 후세대 피눈물한숨 어찌할꼬. 대구 수성 주씨 아재 답 해보소.

힘든 삶에 고통, 견디지 못해 스스로 선택한 죽음, OECD국가 중 (2003~2016)14년간 일위는 한국이다. 죽은 자와의 관계인연, 남은 사람가슴에 영원히 뽑지 못할 대못 질이다. 한 생의 완성이자 마지막 종착역이 죽음이다. 비급하고 졸렬하게 스스로 버린 목숨, 남은 우리 모두책임 하나 없단 말인가? 올 추석엔 스스로 선택하는 고독사만은 없기를 두 손 고이 모아 합장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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