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신문=정은조 기자]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장충단공원에서 만났던 이준 열사와 김창숙 선생 등 많은 항일 애국선열의 묘소와 4.19 국립묘지가 있는 수유리를 몇 년 만에 다시 찾았다. 조국과 민족을 위해 때로는 목숨을 바치고 때로는 치열한 삶을 바친 항일 애국선열들. 후손인 우리의 기억에서 희미하게 멀어져 가는 애국선열을 기억해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
햇살이 제법 따가운 날이었다. 서울 지하철 4호선 수유역 4번 출구에서 120번 버스를 타고 덕성여대정류장에서 내려 길을 건너면 ‘솔밭공원’이 자리 잡고 있다.
평일 오전 시간이지만 소나무 그늘이 드리운 한편에서는 운동하는 어르신들, 다른 편에서는 어린이집 행사인 듯 선생님과 어머니들, 어린이들이 어울려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스케치화를 그리기 좋은 맑고 푸른 하늘 사이로 멀리 삼각산(백운대, 만경봉, 인수봉) 풍경이 어우러진다.
접근이 편하고 소나무 그늘이 울창하고 북한산자락이라 공기도 신선하다. 주말에는 가족들이 한가한 여유를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다.
솔밭공원 왼편으로 조금 걸어 올라가면 북한산 둘레길 2코스인 순례길 입구가 나타난다. 순례길 코스 입구에는 1905년 을사늑약 이래 1945년 광복까지 선조들의 독립운동을 간략하지만 함축해 소개한 안내문 4개가 자리잡고 있다.
녹음이 푸르게 짙어가는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로 새소리가 조용히 울리는, 그리 가파르지도 않고 잘 정비된 산길을 걸어간다. 6월 초지만 한 여름의 날씨인지라 50여 미터를 걸었을 뿐인데 이마에는 벌써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힌다.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이 4.19국립묘지가 내려다보이는 전망대다. 1960년 4월 19일,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독재정권의 불의에 맞선 항거다. 불길처럼 타올라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초석이 된 역사적 사건을 기억하고 희생자들을 모시는 국립묘지다. 4개의 기념탑과 20개의 만장, 그리고 200명의 4.19 희생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묘역이다. 이은상 시인은 다음과 같은 글로 그들을 위로하고 후손들에게 위대한 정신을 본받을 것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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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과 불의에 항쟁한 수만명 학생대열은 의기의 힘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를 바로 세웠고
민주 제단에 피를 뿌린 185위의 젊은 혼들은 거룩한 수호신이 되었다.
해마다 4월이 오면 접동새 울음 속에 그들의 피 묻은 혼의 하소연이 들릴 것이요
해마다 4월이 오면 봄을 선도하는 진달래처럼 민족의 꽃들은 사람들의 가슴마다 되살아 피어나리라.
잠시 머리 숙여 묵념한다. 열사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역사의 수레바퀴를 올바르게 이끌어 가겠다고 결심했던 패기만만한 수많은 젊은이는 어디 가고, 이빨 빠진 바퀴로 덜컹거리는 수레를 힘없이 끌고 있는 희끗희끗한 머리의 노신사들은 어디서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4.19 전망대 맞은편, 탐방안내소에서 직원의 안내를 받았다. ‘너랑 나랑 우리랑 스탬프 투어’프로그램이 있다. 우이동 만남의 광장, 소나무쉼터, 4.19 전망대 그리고 근현대사기념관 등 4곳에서 스탬프를 받으면 소정의 기념품과 식당, 카페 등 제휴업소에서 할인을 받을 수 있다. 근현대사기념관을 들러 안내 받은 뒤 순례길을 걸으면 더욱 이해가 쉽다.
시 발걸음을 옮기니 강재(剛齎) 신숙 선생의 묘소가 나온다. 건국훈장 독립장이 수훈된 신숙 선생은 3.1 운동에 참여한 뒤 중국으로 망명해 1930년 한국독립당을 결성하고 한중연합군의 한국독립군 참모장을 지낸 애국선열이다. 묘소에는 부인 최백경 여사도 같이 잠들어 있다. 이분도 2명의 아들을 독립군으로 양성한 숨은 애국선열이다. 잠시 두 분의 독립운동에 바친 열정에 감사드리며 묵념을 드린다.
잠시 숨을 고르고, 길을 재촉하니 장충단공원에서 만난 파리장서 운동을 주도한 심산 김창숙 선생의 묘소와 동암 서상일 선생, 현곡 양일동 선생의 묘소가 가까운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심산 김창숙 선생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반대와 을사오적을 처벌하라는 상소를 올려 옥살이했고, 1946년 성균관 대학을 설립한 애국선열이다.
동암 서상일 선생은 대동청년단을 만들고 광복단을 조직했다. 현곡 양일동 선생은 광주학생운동을 주도하고 무정부주의 단체인 흑우연맹에 가입해 항일의식을 높이는데 기여하고 광복 후에는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선생들의 묘소는 이름 모를 새소리만 들릴 뿐 지나가는 등산객들도 눈길을 주지 않는 쓸쓸한 풍경이다.
30도가 넘는 초여름 날씨지만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고, 바람은 귓가에서 살랑거린다. 반대편에선 어린이집에서 소풍 나온 것 같은 한 무리의 아이들과 선생님들을 만났다. 아이들은 더운 날씨에도 즐거운 표정으로 씩씩하게 걸으며 선생님께 길을 재촉한다. 아이들과 인사를 주고받는다. 아이들은 처음 보는 나에게 “안녕하세요” 배꼽 인사를 하며 환하게 웃었다. 아이들과 환하게 인사를 나누니, 피로가 싹 가신다.
소나무 숲의 짙은 그늘에 단주 유림 선생의 묘소가 보인다. 한국 아나키스트의 대표적 인물이다. 사회를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지배자가 없는 상태로 만들려는 정치적 철학적 사상이 ‘아나키즘’(anarchism)이며, 이러한 사상가를 아나키스트(anarchist)라고 한다. 유림 선생은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손가락을 잘라 충군애국(忠君愛國)의 4자 혈서를 써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맹세했다. 1921년 북경에서 신채호, 김창숙 등과 순한문지 ‘천고’(天鼓)를 발간하고, 상해로 건너가 김규식, 여운형 등의 신한청년당에 가담해 활동했다.
섶다리를 지나 이준 열사 묘역으로 가는 길에 태극기의 변화 과정을 보여주는 안내문 4개가 다소곳이 길옆에 늘어서 있다. 1882년 수신사 박영호가 만든 태극기부터 1890년 고종이 하사한 태극기, 1921년 임시정부 기념식,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에서 사용한 태극기, 그리고 1949년 이후 사용하고 있는 태극기가 일목요연하게 설명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