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씨(여·65)는 평소 모임에서 친근하게 지내던 동갑내기 K씨(여)로부터 “행운의 소식이 있으니 만나자”는 전화를 받았다. K씨는 L씨의 장점을 칭찬하며 환심을 샀고, L씨의 경제 사정을 걱정하며 위로했다. 이어 K씨는 “지금 200만 원어치의 가상자산(코인)을 사면 한 달 후 회사가 상장해 400만 원을 벌 수 있다”며 설명을 시작했다.
L씨는 가상자산에 관심도 없고, 투자할 여력도 없었다. 게다가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라 거부 의사를 분명하게 전했다. 하지만 K씨는 “이 투자는 행운”이라며, “경제 사정도 어려울 텐데, 혜택을 받지 못하면 바보”라며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심지어 K씨는 “이번에 200만 원을 투자하고 3명만 모으면 팀장이 된다”며, “한 사람당 수당이 300만 원이나 된다”는 솔깃한 제안까지 더했다.
L씨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다단계’가 떠올랐다. 뭔가 수상한 느낌이 들었다. 불쾌한 만남을 끝내고 돌아온 L씨에게, K씨는 자료 출처가 불분명한 유튜브 동영상과 각종 사진들을 보내왔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가상자산 사기피해
L씨처럼 퇴직금을 받았거나 노후자금을 가진 사람들, 유산상속 등으로 목돈이 생긴 시니어들이 가상자산(또는 암포화폐·가상화폐·디지털자산 등)을 내세운 사기범죄의 먹잇감이 되고 있다.
블록체인 데이터 플랫폼 기업 ‘체이널리시스’가 3월 21일 발표한 ‘2022 가상자산 범죄 보고서’에 따르면, 2021년 기준 가상자산 총 거래 금액은 15조 8000억 달러(약 2경376조2330억 원)로 전년 대비 550% 증가했다. 이 가운데 불법거래 금액은 140억 달러(약 18조 원) 이상으로 2020년 78억 달러(약 10조 원)보다 증가하며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실제로 일확천금을 노리는 전국 남녀노소를 대상으로 사기 조직들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이들은 오프라인 설명회를 열며 몰려든 투자자들에게 마치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하는 디지털 콘텐츠 플랫폼 기업인 냥 허위 선전하며 투자를 부추기고 있다.
심지어 증권가에서나 볼 수 있었던 첨단 사기수법들이 가상자산을 매개로 나타나며 피해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가상자산 사기사건 유형에는 채굴기계, 가상자산 상장, 해킹, 다단계 등 다양하다. 이 가운데 시니어나 고령자들은 다단계에 가장 많이 노출되고 있다.
은행과 정식 협약한 대형 거래소 이용해야
L씨는 K씨의 제안에 의심스러운 점이 많아 알고 지내던 가상자산 전문가에게 문의했다. 처음 투자 설명을 들었을 때 마음이 흔들리기도 했다.
L씨가 만난 한국가상화폐연구소 박용기 소장(경영학 박사·경영지도사)는 비트코인 가상화폐 블록체인 리스크관리 전문가다. 국내 은행 IT전산팀에서 30년 동안 투자 상담을 했던 박 소장도 코인 투자 열풍이 불던 초기 지인으로부터 코인 투자를 권유받았다. 이틀을 공부하며 알고 보니 ‘코인 다단계’ 사기였다.
박 소장은 L씨가 K씨로부터 받은 동영상과 자료들을 검토한 뒤 “그런 기업의 대표는 없는 사람이고, 다단계 사기”라고 말했다.
박 소장은 “국내 대형 은행들과 정식으로 협약을 맺고 계좌를 운용하는 업체,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대형 거래소를 이용해야 사기를 피할 수 있다”며, “다단계는 절대 피하고 조심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유명인·연예인 내세워 투자 설득
K씨는 집요했다. L씨에게 수시로 전화를 걸었다. K씨는 “지금 강남 OO호텔에서 열리는 설명회에 가는 중인데, 같이 가자”며, “정말 축복 받는 곳”이라고 꾀기도 했다. 결국, L씨는 K씨의 연락처를 모두 차단했다.
사기 조직들은 가상자산 관련 국내 유명기업의 로고가 박힌 현수막을 내걸고 주로 서울 강남의 유명 호텔에서 투자설명회를 열며 투자자들을 현혹한다.
L씨의 지인이 K씨의 유혹에 넘어가 강남의 호텔에서 열린 투자설명회에 참석했다. 그 지인은 “노인 천지에 청년들도 더러 있었다”며, “유명 피부과 원장, 심지어 연예인도 나와 얼마나 그럴싸하게 설명하는지 붙들리면 꼼짝없이 코인을 사야 할 것 같아 도망 나왔다”고 전했다.
피해 시 경찰신고 등 적극 대처해야
K씨와 같은 유치자들은 포섭한 사람들에게 투자원금의 몇 배를 뛰어넘는 고수익을 받는다고 꾀어 가상자산을 사게 하고 고액의 수당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다.
투자설명회에 참석했다 사기당한 한 60대는 “국내의 정계나 재계, 학계 등 유명 인사들이 밀어주는 가치 있는 회사이고, 빨리 투자할수록 더 큰 이문이 생긴다는 유혹에 기회를 놓칠까 봐 얼른 투자했다”고 털어놨다.
가상자산 다단계 사기는 신규 회원의 투자금을 기존 회원에게 지급하며 돌려막는 탓에 피해 회복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지난 5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가상자산 투자자들이 사기 범죄로 본 피해액은 무려 5조 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박용기 소장은 “(건실한 업체에 투자하더라도) 여유자금이나 잃어도 괜찮은 돈이라는 생각으로 투자하는 것이 좋다”며, “사기 피해를 당했을 경우 가장 먼저 경찰에 신고하고 투자를 권유한 유치자도 고소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 소장은 또, “재판을 앞두고 무작정 기다리거나, 다단계 사기범들의 피해금 회복에 대한 설득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며, “체념하고 포기하지 말고 가족들에게 피해 사실을 알리며 적극적인 신고와 고소, 주변의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높은 수익률 보장” 무조건 의심
박용기 소장은 정보보안업체를 비롯해 경찰청이나 금융감독원 등이 제시하는 가상자산 사기 예방법을 알려줬다.
박 소장은 “투자수단이 안정적이며 지나치게 높은 수익률을 보장한다면 일단 의심”하라고 했다. 만약 투자했을 경우 사기 피해를 막기 위해 정보를 공유하는 인터넷 사이트를 적극 이용하고, 보안카드가 노출되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해야 한다. 대체불가능토큰(NFT) 투자도 조심해야 한다.
연령이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여러 사람이 당하는 다중사기인 가상자산 사기. 일반인들이 개인적으로 사기 범죄에 대응하기는 역부족인만큼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적극적인 해결책을 마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