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히 퇴장한 ‘최악의 시나리오’ RCP8.5

조용히 퇴장한 ‘최악의 시나리오’ RCP8.5

지난 10여 년간 기후 관련 기사에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숫자가 있었다. “이대로 가면 지구 평균기온이 4~5도 오른다”는 문장이다. 폭염과 홍수, 해수면 상승을 다룬 다큐멘터리와 보도자료마다 이 숫자가 근거로 인용됐다. 그 숫자의 출처가 바로 ‘RCP8.5’라는 시나리오였다. 그런데 최근 기후과학계 안에서는 이 시나리오가 사실상 폐기 수순을 밟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것도 요란한 발표 없이, 조용히 뒷문으로 빠져나가듯 말이다. 오랫동안 ‘경고’로 받아들였던 것이 알고 보니 애초부터 일어나기 어려운 가정이었다는 사실 앞에서, 기자는 묘한 허탈감을 느꼈다.

■ ‘최악의 시나리오’라는 타이틀

RCP(Representative Concentration Pathways)는 미래 온실가스 농도를 몇 가지 경로로 가정해 만든 모델이다. 그중 RCP8.5는 전 세계가 감축에 완전히 실패했을 때를 가정한 경로로, 오랫동안 ‘최악의 시나리오’라는 이름표를 달고 다녔다. 이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려면 다섯 가지 조건이 동시에 맞아떨어져야 한다. 세계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고, 석탄 사용이 계속 급증하며, 기술 발전은 멈추다시피 하고, 에너지 효율은 나아지지 않으며, 국제 협력마저 완전히 무너져야 한다.

문제는 이 다섯 가지 중 어느 하나도 실제로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는 데 있다. 세계 인구 증가세는 예상보다 빠르게 둔화됐고, 2100년 이전에 정점을 찍고 줄어들 것이라는 전망까지 나온다. 석탄 발전은 선진국을 중심으로 줄어드는 추세이고, 개발도상국에서도 재생에너지 비중이 꾸준히 늘고 있다. 태양광과 배터리, 전기차, 소형모듈원전(SMR) 같은 기술은 시나리오가 가정했던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발전했다. 유럽연합과 한국, 일본, 미국 등 주요국이 저마다 감축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는 점도 국제 협력이 완전히 무너질 것이라던 가정과는 거리가 있다. 그 결과 많은 전문가가 “RCP8.5는 더 이상 현실적인 미래로 보기 어렵다”고 잘라 말하기 시작했다.

■ 허탈감의 정체

여기서 드는 감정은 단순한 안도가 아니다. 오히려 헛헛함에 가깝다. 그동안 대중은 이 시나리오를 근거로 만들어진 그래프와 이미지 — 물에 잠긴 도시, 사막화된 대지 — 를 보며 위기감을 키워왔다. 정책 토론과 국제 협상 테이블에서도 RCP8.5는 ‘가장 나쁜 경우’를 상정하는 기준점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그 기준점 자체가 처음부터 다소 과장된 가정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는 사실이 뒤늦게 확인되면서, “그동안 우리가 봐온 공포는 무엇이었나”라는 질문이 남는다.

물론 이 허탈감이 “그러니 걱정할 필요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져서는 곤란하다. RCP8.5는 실제 일어날 미래를 예측한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이렇게 된다”는 경고판이었을 뿐이다. 경고판의 그림이 다소 과장되었다고 해서, 경고 자체가 가리키던 위험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짚어둘 필요가 있다.

돌이켜보면 이런 허탈감은 처음이 아니다. 한때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예측이 시간이 지나 슬그머니 자취를 감추는 일은 여러 분야에서 반복돼 왔다. 다만 이번 경우가 유독 씁쓸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 시나리오가 단순한 학술 논쟁거리가 아니라 각국 정부의 정책 목표와 국민 세금이 걸린 협상 테이블의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기준이 흔들리면 그 위에 세워진 목표치와 예산 배분의 근거도 함께 흔들릴 수밖에 없다.

■ 시나리오는 왜 자꾸 바뀌었나

국제 기후변화 보고서, 즉 IPCC 보고서의 시나리오는 그동안 여러 차례 옷을 갈아입었다. 초기에는 사회·경제 조건을 복잡하게 가정한 방식을 썼고, 이후에는 온실가스 농도만 놓고 단순화한 RCP 방식으로 바뀌었다. 최근에는 사회·경제 상황과 배출량을 함께 고려하는 방식으로 다시 발전했다. 하지만 여기에도 빈틈은 있다. 인공지능과 데이터센터가 몰고 올 전력 수요 폭증이라는 새로운 변수를 아직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 ‘기술만 바꾸면 된다’는 착각

보고서가 짚은 또 하나의 대목은 그동안의 감축 정책이 ‘기술 교체’에만 머물렀다는 점이다. 태양광과 전기차 보급에는 힘을 쏟았지만, 자동차 중심의 도시 구조나 끝없는 소비를 부추기는 경제 구조는 그대로 둔 채였다. 여기에 화석연료 산업의 정치적 저항, 탄소세와 에너지 가격 상승이 서민 가계에 주는 부담까지 겹치면서 정책은 자주 흔들리고 후퇴했다.

■ 남은 숙제

RCP8.5라는 이름의 ‘괴물’은 무대 뒤로 퇴장하고 있지만, 그 자리를 대신할 만한 새로운 경고판은 아직 마땅치 않다. 게다가 그 빈자리를 메울 새로운 위험 요소가 이미 등장했다. 데이터센터와 인공지능 연산이 삼키는 전력량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시나리오 설계자들의 계산 밖에 있던 변수다. 낡은 괴물이 퇴장한 자리에, 아직 이름조차 제대로 붙지 않은 새로운 변수가 조용히 들어서고 있는 셈이다.

앞으로의 시나리오는 기술 하나만이 아니라 에너지·도시·소비·디지털·형평성이라는 사회 구조 전반을 함께 그려야 한다는 것이 보고서의 결론이다. 한국 역시 사회적 에너지 절약과 형평성을 함께 갖춘 길, 기술에 의존하되 배출 부담이 남는 길, 정책 실패 시 도달할 위험한 길 사이에서 선택을 앞두고 있다. 철강은 전기로와 수소환원제철로, 시멘트는 저탄소 원료로, 반도체는 무탄소 전력을 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구체적 과제도 함께 제시된다.

기자는 이 허탈감을 이렇게 정리해본다. 겁을 주던 괴물이 실은 그리 크지 않았다는 사실은 다행이지만, 그 자리를 빈손으로 채워서는 안 된다는 것. 낡은 경고판을 내렸다면, 이제는 더 정확하고 더 현실적인 새 경고판을 세울 차례다. 그 새 경고판에 무엇을 적을지는 과학자들만의 몫이 아니라, 시민과 정부, 기업이 함께 채워가야 할 여백으로 남아 있다.

서일석 기자
서일석 기자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한 시민 교육과 국가와 지방 정부의 미세먼지 저감, 기후변화 대응과 에너지 전환 정책의 계획 이행 결과 와 평가 정보를 시민들과 공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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